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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두레박 제 16집 동인시집

2011.12.11. 14:59

  

▲동인시집 [꿈과두레박. 제16집]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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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과두레박 제16집 ]

동인시집 시집 / 기획출판 오름(2011.10.3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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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침몰하다

권예자


멸치를 다듬는다

머리는 댕강 자르고

배를 갈라 마른 내장을 뺀다

한 움큼 다듬다 얼핏 보니

잘린 머리에서 빛나는 멸치의 눈들

서슬 푸르게 나를 째려보고 있다


한 가닥 물결로 유영하던 그날

죄 없이 체포 구금 되어

팽형(烹刑)에 처해지고

바사삭 말라 교수형을 당했어도

두 눈 하얗게 부릅뜨고 힐책하는

저 당당함


일순

방안 가득 출렁이는 파도

갯냄새 눅진하다

나는 목 잘린 멸치 떼에 둘러싸여

아래로, 아래로 침몰하는 중이다




존재의 가치

박현숙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

나를 만지는 뻘건 고무장갑 손

몸 으스러져라 비틀고 짜내어

데려간 곳은

신발자국 건너간 거실이며

깨끗지 못한 방바닥 후미진 곳까지

그리고는 먼지투성이 창틀에 끼워

꼼짝없이 깜장 뒤집어씌운다

숨 쉴 수 없다

몸부림 쳐도 안중에 없고

입가에 웃음소리까지 흘린다

그러다 전사로 돌변

나를 휘어잡고

미친 듯 후려갈기면

영락없이 파리새끼 한 마리

나가떨어지고

공중 부양시켜 거미사냥도 한다

하소연해야 소용없다

나는 그녀의 자부심이다

나로 인해 그녀 세상이 빛난다

땀 흘린 후 하얀 거품 목욕에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가지 안겨주는

그녀는 나와 동거중이다




이렇게 좋은 날엔

백경화


이렇게 좋은 날엔

지리산에 가고 싶다

정상에 올라 온 세상 바라보면

내 마음은 벌써 텅 빈 하늘이었지

시원한 바람 가슴속에 파고들면

나는 풍선이 되어 날아다녔지

첫 번째 산행에서

천왕봉에 올라 표지석을 끌어안고 울었었지

제석봉 고사목 군락지를 보고

시 한 편 내려 그렸지

별 쏟아지는 밤 세석평전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 쫄쫄 흐르는 물소리

피아노 연주소리로 들렸지

들꽃과 바람 하안 구름까지 내 곁으로 내려와

정답게 속삭여 주었지

지리산에 가고 싶다 이렇게 좋은 날엔




새우젓

이  선


토요장터 젓갈전에서 새우 한 마리 입에 넣으니

탱탱한 새우가 짭쪼롬 입맛을 당긴다

세상은 온통 물로만 채워진 줄 알았던 새우가

어느 날 그물에 걸려 육지로 올라와

가느다란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보려는 순간

온몸은 소금으로 덮여지고

큰 항아리에 담겨 토굴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젓도 젓 나름, 젓이라고 다 맛깔스런 것은 아니다

오젓, 육젓, 추젓이 제각기 맛자랑을 하지만

살 오른 유월에 잡혀 천일염 옷을 두툼하게 입고

사늘한 광천 토굴에서

몇 달 푹 잠재운 육젓이라야 제 격이다

한 번 염장으로는 상질의 젓갈로 탈바꿈할 수 없어

두 번째 염장을 질러 완전 봉쇄된 채

토굴 속 은둔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푸른 바다의 자유를 꿈꾸는 동안

새우는 서서히 익어가며 계절 하나 훌쩍 넘긴다

김장철이 되어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된 새우

뭐니 뭐니 해도 젓 중에는 육젓이 최고라는

아주머니들의 입담에 뽀얀 등살이 더욱 통통해 진다

염장에 익숙해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빗나간다는 것

이미 등 굽은 새우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이영순


바람 부는 대로

수천수만 번 흔들리는 풀잎이다


실낱보다 더 미미한 햇살을

까치발 떼며 따라가는 해바라기다


시나브로 품고 가는 강물의 별빛

밤낮으로 실뿌리가 쿵쿵거리는 물냄새다


무덤까지 따라붙는 그림자다




상생의 손*

이춘희


거기엔 끝내

마주 잡아야 할 시간들의 약속이 있습니다

바다와의 약속은 늘

저녁의 노을들을 이끌고 와

저토록 뜨거운 실핏줄을 곤두세우는가 봅니다

그리하여 광장의 사람들은

바다와 해후하는 법을 알고

또 다른 약속을 바다와 나누는 법을 압니다

그리고 거기엔

망각의 시간을 찢고 올라와

한아름 뭍을 건네받으려는 오랜 열망이 있습니다

 * 포항에 있는 조형물




내 몸이 수상하다

이형자


구절초가 고스라 들고 가을이 저만큼 빗장을 채우는데, 몸과 마음이 계절을 따라가는지 오돌토돌 닭 벼슬같이 혓바늘이 솟아 입속이 따끔거리며 어지럽다. MRI 검사실 앞에서 차례 기다리고 앉아 있다가 담당의사가 부르는 소리에 지례 놀라 뛰는 가슴으로 검사대 위에 누웠다 “숨 들어 마시고 숨 참으세요, 숨 내쉬고 숨 참으세요.” 몸 구석구석을 0,5센티미터 간격으로 짧게 잘라 검사해 들어가는 의사 뒷모습에도 오금 저리다. 허겁지겁 박으로 나와 길가에서 노랗게 물든 잎 떨구는 은행나무 밑에 섰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란 이유로, 살아온 것도 죄가 되는가. 앞만 향해 달려간 죄 밖에는 없는데 나는 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인가 생은 안개 같아서 예순의 나이로 여기서 저기서 지워진 이름들도 많은데 내 몸이 수상하다 하나님 저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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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삶이란 너울을 타며

봄여름 지나는 동안

진주처럼 자란 마음의 알

껍질을 깨듯 뚫고 나온 시심의 열정

가을보다 더 붉다

마침표를 찍기 전 하고픈 일들

어찌 계절을 헤아릴까만

후회 뒤에는 깨달음을

어려움 속에서는 지혜를 캐어

시라는 이름으로

이정표를 세우며 가는 동인들 앞에

주춤거리는 자신은

그저 부끄럽고 고마울 뿐이다


초가을 어느날

꿈과두레박 회장 이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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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두레박 제16집


[ 동인시집 해설 ] -

생명수로서의 꿈, 그 시편들

꿈과 두레박 일곱시인의 시

김 용 재

시인, UPLI한국회장



Ⅰ.

이데올로기가 동질적이다. 경향이나 수법이 공통적이다. 또는 장르나 취미가 동일하다. 그래서 서로 에콜(ecole)을 형성할 수 있다…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동인이 되고 동인지를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지로서의 문학동인지는 창조(1919)이고 최초의 시동인지는 장미촌(1921)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문학사의 정상에서 깃발을 펄럭이던 폐허(1920)이나 백조(1922)도 동인지이며 1960년대에 와서는 시단-60년대 사화집-현대시-신춘시-삼장시 등 동인지 전성시대를 이루었고 그 전성시대는 변함없이 지속되어 오늘에 와서는 가히 황금시대라 할 만큼 그 수효가 늘어났다.

어떤 에콜을 형성하거나 구심점을 따지지 않더라도, 전국적으로-지역적으로-같은 잡지 출신끼리-같은 학교 출신끼리-가까운 사람끼리-동종의 직업인끼리…등등 수많은 동인지가 발행되고 있다. 문학적 이데올기나 유파적 경향 또는 특성을 찾아 보기 어렵다 해도, 꼭 그럴 필요도 없다는듯 이들 동인지가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문학적 열정과, 발표 지면으로서의 영향력, 지원체제의 여건상승 등 발행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전지역에서도 눈여겨볼 수 있는 동인지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꿈과 두레박」이다. 꿈은 사랑의 젊은 꿈이나 모든 희망의 꿈으로부터 황량지몽(黃粱之夢)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반려자요 때로는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두레박은 인생의 물 또는 생명의 물인 그 꿈을 길어 올리는 도구이며 시적 이미지로서 참 아름답고 보배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 아낙으러서의 꿈과 두레박을 운영 관리하는 권예자, 박현숙, 백경화, 이선, 이영순, 이형자 시인이 있다. 이 시인들이 모여서 ≪꿈과 두레박≫제16집을 발간한다.

두레박줄을 늘이고 더러는 두레박틀을 이용하여 정성껏 길어 올린 생명수로서의 꿈, 그 시편들을 살펴본다. 평가의 입장보다는 감상의 견해에 가까운 내용이 될 것이다.



Ⅱ.


세상이 온통 서바이벌 게임에 미쳐 있다

오페라 가수, 위대한 탄생

나는 가수다, 신입사원, 불후의 명곡

김연아의 키스 앤 크라이까지

세상은 누군가를 탈락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듯하다

학교와 직장도 등수와 서열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기차를 타고가다 우연히 본 창 밖

전신주 하나가 속도에 뒤질세라

나를 뒤쫓고 있다

산도 보리밭도 그 뒤를 따라 달린다

산속 묘지 구름까지

달리기 대열에 합류한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저들은 언젠가 나를 추월하여

밀어내고 말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꾸자꾸 앞 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도

서바이벌게임의 레일 위를

질주한다

또 누군가 탈락할 것이다

벌써 조명등이 켜지기 시작한다

- 권예자의「서바이벌」전문


서바이벌(survival)은 생존, 존속, 잔존의 의미이며 남보다 오래 사는 것을 강조한다. 더불어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 자연도태로 그 의미가 확충된다.

이 시에서는 세상이 온통 서바이벌 게임에 미쳐있는 실제적 현상(1연)과 등수와 서열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그래서 누군가를 탈락시키려는 듯 한 세상에 대한 우려(2연)가 제시된다.

이러한 현실진단에 대한 근심과 걱정은 마침내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자연경관에까지 유입되어 그들이 모두 달리기 대열에 합류한다(3연)고 느끼게 된다. 이 느낌은 갑자기 불안으로 심지가 돋아 자신에게로 밀려오는 추월의 물결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4연). 그러나 별 수 없이 서바이벌게임의 레일 위를 질주하며 탈락자, 자연도태자의 조등이 벌써 켜지기 시작한 것이다(5연).

자신이 살고 있는 동시대의 사회상을 성찰하는 시력이 양호하고, 달리는 기차의 등장과 조등의 불빛은 서바이벌 현상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우수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다. <바다에 침몰하다> <버드나무가 살찌는 이유><게시판>등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해질 녘 냇가

어디서 온 걸까

일제히 날아오르는 무리들

은빛 날개 흔들며 춤 춘다

눈빛 멀리 보는 척 하다가도

어깨쯤 맴도는 그녀는 없을까

눈부신 몸짓으로 그녀를 찾는다

천 날을 준비한

단 하루 사랑

온몸 다하여Ⅴ

눈물나도록 춤추는

치열한 정리(情理)뜨겁다

이내 시간 저편으로 사라질

마지막 불꽃

-박현숙의「마지막 불꽃-하루살이」전문


하루살이는 부유류(蜉蝣類:ephemera)에 속하는 곤충의 총칭으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고 한다. 유충은 물속에서 수년간 생활하다가 탈피(脫皮)하고, 불완전변태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성충은 여름 저녁 공중에 떼지어 돌아다니는데 이름과 같이 하루만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수명은 수일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수일간 사느냐 단 하루만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 하루살이는 생활이나 목숨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대상으로 일반화 되어있다.

박현숙 시인은 이런 일반화의 개념에 머리 숙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 조성에 열의를 보이며 시인의식을 강렬하게 촉구하고 나선 것이라 보여 진다.

하루살이의 무리를 보면 그 무리가 ‘춤춘다’는 표현으로 장단과 흥과 가락의 의미를 살려내고 있으며 ‘눈부신 몸짓으로 그녀를 찾는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켜 그리움이나 사랑의 온후함을 길러내고 있다. 그리고 치열한 인정과 도리의 뜨거움을 마지막 불꽃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경(詩經)의 조풍(曹風)편에 부유지익(蜉蚴之翼) 변변의복(釆釆衣伏)이란 싯귀를 연상케 하는데 ‘내일없는 하루살이 날개라지만, 울긋불긋 그 얼마나 고운 옷인가’라는 의미로 새기고 있다. 인생 백년이 하루같고 만나면 떠나는 이치이지만 하루살이의 삶에서, 삶다운 하루 그 긍정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이 시는 분명 보편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작품이 될 것이다.

<버려진 행운목><분갈이><벚꽃 아래서><존재의 가치><어느 사내 일기>등 긍정의 눈빛이 투사된 박현숙 시인의 작품 속에서 독자는 건강한 시의식의 열매를 딸 수 있을 것이다.


바람도 자고 조용한 한라산 중턱

천태만상 조각 전시장이다

밤새 퍼부었던 눈덩이 뒤집어 쓰고

추위를 이겨낸 나무와 나무들

서로 부등켜 않고 한 몸 되었다

사슴뿔로 치장한 작은 나무들

더 작은 풀잎들은

바닷속의 산호초가 되어

세상은 온통 순백의 나라

바람이 가져다 준 아름다운 선물

그 안에서 나를 보았다

수없이 만들다 실패한 조각품


우주 속에 들어와 꿈을 꾸고 있는가

- 백경화의「조각전시장」전문


백경화 시인의 수록작품은 등산에서 얻은 산문적 시편들이 주축을 이룬다.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에서는 성판악의 새벽, 다이아몬드 세상을 그렸고 「춤추는 무대」는 백록담 정상, 구름들의 춤이 배경이 되었다.「이렇게 좋은 날엔」에는 지리산 정경이, 「유월의 덕유산」에는 의인화의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섬진강 강변에서」는 평화로운 웃음이 펼쳐져 있다.

「조각전시장」역시 등산에서 얻은 그림이며 한라산이 무대로 되어있다. 이 시는 눈속에 조망해보는 한라산의 모습이 천태만상 조각전시장이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총화로 미리 제시되었고 총화를 이룬 개별 이미지들이 후에 제시되었다.

눈덩이를 뒤집어쓰고 나무와 나무들이 한몸이 된 모습, 작은 나무들을 치장한 사슴뿔 모습, 바닷속 산호초가 된 풀잎의 모습, 이들이 모두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인데 그 안에서 ‘나’를 보면 나는 분명 자연의 선물, 자연의 그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 동행 동화의 순응원리보다 역행 이화(異化)의 반동원리가 감각 경험으로 작용하여 그 모습은 모두 실패한 조각품으로 나타난다.

‘나’도 실패한 조각품으로 동일시되어 ‘우주 속에 들어와 꿈을 꾸고 있는가’, 자문하듯 끝을 맺고 있는데 그 꿈은 회한의 꿈이라기보다 완성을 갈망하는 꿈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볼 수 있을 것이다.


무채를 썰다 손을 베었다

손을 감싸 쥐고

원망스런 눈빛으로

칼끝을 노려본다

바르르

눈꺼풀에 경련이 일 뿐

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할 뿐이다


상처를 낸 것은

칼날이 아니다

시퍼런 칼도

스스로 상처 내지 못한다

가끔

무 한 쪽 베지 못한 칼

밤새도록 간 적 있다

-이 선의「침묵」전문


이 시는 무채를 썰다 손을 벤 생활경험 하나가 좋은 작품으로 승화되고 형상화 되었다. 물론 이 경험을 시인 하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만인의 주부의 경험이오, 주부 이전의 여성이나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남성의 비슷한 경험이기도 하다. 그 흔한 경험을 토대로 한 시가 어떻게 훌륭하게 구성 되었는가 살펴보자.

칼은 우리 생활에 크게 도움을 주는 문명의 이기(利器)요, 과학의 한 상징이다. 이용을 하면 한없이 즐겁고 유익한 것이지만 마음을 멀리하고, 또는 주의력을 잃고, 오용을 한다면, 불이익을 당하게 되고, 상처를 입고, 위험에 처하고, 경웨 따라선 목숨까지 앗기는 큰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이 시에서는 칼이 상처를 내놓고도 ‘침묵할 뿐이다’라고 했는데 ‘상처를 낸 것은/칼날이 아디다’라고 다시 직설적 설명이 붙어 다소 의아스럽긴 하지만 ‘시퍼런 칼도/ 스스로 상처내지 못한다’는 말로 제시된 의미가 제2의 의도된 시심으로 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무딘 칼 밤새도록 갈고 그래서 칼에 날이 서도 아무일 없었던 대응적 의미가 그 빛을 더욱 밝게 할 것이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의 이용은, 이용의 목적을 찾는 자의 것으로 작용할 것이요, 그 오용은 불행을 자초하는 자의 것으로 작용할 것이다. 새삼 시와 과학으로 상호작용하는 심상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새기는 것 같아 시 읽는 기쁨을 더한다. 그래서 「침묵」은 단순한 말없음이 아니라 선(善)이나 이용(利用)의 가치를 직감하고 직각(直覺)하는 시의 기제(機制)로 외침을 동반할 것이다.


앞을 막아선 어린 뱀

한 참을 꼼짝 않고 날 파먹었다

그가 써놓은 불립문자 차마 지울 수 없어

그 가는 걸음걸음 바라보며


실 낫 같은 종소리에도

나는 울었다

가물에 주저앉은 풀잎되어

저녁 종소리로 울었다

-이영순의「불립문자」전문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문자나 언어로 뜻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다. 현실의 문자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자요 마음의 문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전제되어야 할 문제가 곧 어떤 깨달음이 되겠는데, 불가에서는 불도의 깨달음이 되겠지만 시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에 대한 깨달음이나 인식 정도로 보아도 될 것이다.
이영순 시인의 「불립문자」는 뱀에 대한 깨달음이며 뱀 자체가 또한 불립문자다. ‘앞을 막아선 어린 뱀이’‘한참을 꼼짝 않고 날 파먹었다’는 도입부터 하이퍼의 초월적 뛰어넘기가 어울려든다.

우리는 뱀을 보는 순간 놀라게 되고, 걱정 근심 불안으로부터 공포 저주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압도의 상황에 서있게 된다. 뱀은 또한 “악업이 깊은 짐승”(법화경)이라 했는데, 그래서 적의와 경계의 자세를 보며 죽이기 전쟁을 하거나, 또는 물러서기를 기다리거나 도망치거나 해야 한다. 시인의 경험은 정신적 압도의 상황에서 ‘날 파먹었다’는 인식이 가능했을 것이다. 뱀의 실재가 생명세계 침식의 인식체계로 건너뛴 것이다. 그 뱀이 불립문자를 써놓고 가는 걸음걸음을 바라보며 ‘실낫같은 종소리’를 듣고 ‘나’는 울었으며 그 울음은 저녁 종소리 자체였다.

종소리의 근거는 앰비귀티(ambiguity)를 증폭시키고 있지만 일단 깨달음의 종소리, 세심(洗心)의 종소리, 또는 조종(弔鐘)으로서의 경종의 소리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엔 끝내

마주 잡아야 할 시간들의 약속이 있습니다

바다와의 약속은 늘

저녁의 노을들을 이끌고 와

저토록 뜨거운 실핏줄을 곤두 세우는가 봅니다

그리하여 광장의 사람들은

바다와 해후하는 법을 알고

또 다른 약속을 바다와 나누는 법을 압니다

그리고 거기엔

망각의 시간을 찢고 올라와

한아름 뭍을 건네받으려는 오랜 열망이 있습니다

-이춘희의「상생의 손」전문


이춘희 시인의 「상생의 손」은 포항에 있는 조형물의 작품명을 시 제목으로 차용한 것이다. 그 작품은 바다에서 치밀은 손의 모습인데, 그 실제의 모습과 명칭에 압도되어 그대로 이용했을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그만큼 좋은 제목이 어디 또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상생의 손’은 의미하는 바 높고 넓으며 시사성도 큰 것이다.

‘상생’은 너와 내가 서로 사는 이치인데, 우주간에 운행하는 다섯가지 원기 즉 오행상생의 의미와 불가의 수행원리인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지관(止觀)의 의미까지도 담고 있을 것이다.

‘손’은 역시 순수한 우리말로서의 의미영역이 대단히 넓다. 예를 들어본다면 대전의 일손이 부족하다(일할 사람, 노동력), 대전 사람 손이 가야한다(기술, 기예), 대전친구와 손을 잡다(교제, 교류), 대전사람 손을 빌었다(주선, 조력), 대전사람 손이 크다(아량, 포용), 대전사람 손을 놓치지 말라(기회, 호기), 대전사람 손안에 있다(소유, 권력), 대전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화해, 협력), 대전에는 뽑힌 손이 많았다(선수, 대표)…등등 좋은 의미가 무성하다.

이춘희 시인은 이러한 상생의 손을 본 경험을 놓치지 않고 시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마주잡아야 할 시간들의 약속’을 제시한 것은 만인만세의 상생의 손을 집약적으로 떠올린 결정이며 바다와의 약속, 바다와의 해후는 세상과의 교제이며 삶의 교류영역이라 할 것이다. 마침내 ‘망각의 시간을 찢고 올라와/한아름 물을 건네받으려는 오랜 열망’이 있다 한 것은 절창이며 또 하나의 손의 의미를 천착한 것이다.


계룡산 나들이에서 봄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봄으로 오신 듯

솜사탕 봉지 들고 금방이라도 안길 듯

연분홍 떨림으로 눈부신 봄

살며시 다가가 볼을 만져보는데

만지는 이역 손도 같이 떨리잖아요


하루 온종일 만나고도

그새 그리워 잠 못 이루는데

밤바람은 속도 모르고

빠른 걸음으로 가내요

두고 온 봄 멀어지면

부지하세월 체머리 흔드는

봄비까지 내리려나 봅니다


환-한 봄, 떨어진 그 입술조차도

시인묵객이라 하던데

술이나 몇 순배 더 나눠 볼 껄

아참! 할머니에게는 말 하지 마세요

그 봄 이야기하면

할머니는 가래톳이 생긴다나 봐요

-이형자의「벚꽃」전문


이형자 시인의 「벚꽃」은 의인화(personification)의 생동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며 자신과 대상과의 융합을 의식하는 소위 감정이입(empatlhy)으로서의 심리작용이 원만하게 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벚꽃은 도리행화(桃李杏花)를 물리치고 짧은 기간이지만 봄을 독차지한 듯 총애를 받고 있다는 입장에서 눈부신 봄 그 자체이다. 그래서 볼을 만져보고 온종일 만나고도 그리움은 불면의 밤으로 다가선다. 그때 발 빠른 밤바람과 체머리 흔드는 봄비의 출현을 벚꽃에 상처를 주는 걱정의 조짐이며 싫증의 징후인 것이다. 그래서 걱정의 조짐이 있기 전에 시인묵객으로서의 벚꽃과 술이나 몇순배 더 나누며 즐기지 못한 정한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환한 벚꽃의 봄 이야기가 할머니에겐 가래톳의 원인이 된다. 불두덩 옆 오목한 곳의 임파선이 부어 켕기고 아프게 된 멍울이 가래톳인데 그 부분이 곧 신체의 특수한 감각영역이 될 수 있어 이성적 감정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벚꽃은 봄을 대변하는 이성의 손님이기도 한 것이며 움츠렸던 몸에 생기를 북돋아주는 감정전이(displacement)의 활력소이기도 한 것이다. 사투리(또는 토속어)로 엮은 「동벽씨네 울안이야기」나 산문식 얼개를 이룬 「내 몸이 수상하다」나「화려한 나날들」도 많은 독자들에게 활력소 역할을 할 것이다.



Ⅲ.


이상 꿈과 두레박 동인들의 시를 한편씩만 살펴보았다. 평범한 일상에서 평범치 않은 소재를 구한다거나 평범한 것이라도 남다른 시력을 투사해본다거나 새로운 상상력으로 깊이 있게 대상을 해석해보는 노력들이 편편마다 증폭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시 해석의 길에는 정답이 놓여있지 않다. 시인이 가는 길 그 자체도 끝이 없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시 해석의 최선의 답을 찾고 시인이 가는 길의 끝을 찾으려고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의 의미를 축소해 본다면 나름대로의 시론을 정립 할 수도 있고 시에 담아야할 내용물도 간추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각별한 삶의 의미를 담아낸다. 사물에 대한 의미를 영상으로 포착한다. 자연 또는 환경의 숲에 몰입한다. 낭만이나 이상의 세계를 탐색한다. 역사 또는 동시대의 사회상을 투시한다. 맴고 시큰한 비평의 안목을 밝힌다. 또 다른 실험적 이미지 구성에 열중한다.…등등 광범위한 시의 영역을 자신의 세계로 축소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크게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두모두 건투, 정진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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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사의 글


대전지역에서도 눈여겨볼 수 있는 동인지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꿈과 두레박」이다. 꿈은 사랑의 젊은 꿈이나 모든 희망의 꿈으로부터 황량지몽(黃粱之夢)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반려자요 때로는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두레박은 인생의 물 또는 생명의 물인 그 꿈을 길어 올리는 도구이며 시적 이미지로서 참 아름답고 보배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 아낙으러서의 꿈과 두레박을 운영 관리하는 권예자, 박현숙, 백경화, 이선, 이영순, 이형자 시인이 있다. 이 시인들이 모여서 ≪꿈과 두레박≫제16집을 발간한다.

- 김용재(시인. UPLI한국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