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못할 아름다운 한라산 종주- 산행기
산행기 사람과 산 2004년 8월호
잊지못할 아름다운 한라산 종주
우리는 한라산의 4구간을 종주 했다.
산을 좋아하고 유달리 산에 대한 욕심이 많은 나는 제주도까지 가서 성판악~관음사의 코스로는 양이 차지 않아 갈 때마다 영실~어리목에 대한 미련을 안고 왔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라산의 4군데 코스를 종주하고 올 생각으로 회원들에게 내 뜻을 비치니 회원들은 할 수 있을까하는 반신반의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의 산행 경험으로 보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 달 전 금강산에 가서도 세존봉 등산 후에 다음날 만물상에 올라갔고, 지난 가을에는 더 험하고 긴 설악산 한계령에서 시작하여 공룡능선도 탔다.
2박 3일간의 산행과 관광 계획을 세우고 우리 등산 팀 46명 회원들은 새벽5시 목포를 향해 떠났다. 매번 비행기로 갔지만 이번에는 경비도 절감하고 남해의 다도해도 구경할 겸 배를 타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의 여행이 더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목포에서 9시 30분에 출항하는 고속월드 훼리호를 탔다. 46명이 다 들어갈 수 있는 큰방 한 칸을 배정 받아 짐을 풀고는 제각기 밖으로 나와서 자유의 시간을 갖았다. 주어진 4시간동안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까?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서인지 괜스레 여기저기 배안을 기웃거려도 본다. 방에서 윷놀이하는 사람, 갑판위로 나가 남해의 다도해를 보며 경치를 감상하는 사람, 삼삼오오 벤취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 아무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있다는 현실이, 속박된 생활 속에서 해방된 기분이라고 할까?.
언제든지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만 정해진 시간 속에서 볼 일이 많으면 시간은 빨리도 지나간다.
1시 30분, 제주도에 도착한 우리는 맛있는 해물탕으로 점심을 먹고 몇 군데 관광을 했다. 식물원, 동물원, 분재, 수석, 동굴까지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한림공원을 보고, 하얀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다 낙하하는 주절상은 나이아가라 폭포수를 보는 것처럼 통쾌했다. 엄청나게 예술적으로 지은 약천사에 가서 참배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싱싱한 회 한 접시와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 7시, 성판악 휴게소에서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좋았던 날씨가 오늘은 잔뜩 흐린 가운데 이슬비가 한 두 방울씩 내리더니 결국은 갑자기 캄캄해지고 천둥치며 바람불고 빗방울도 굵어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비가 와서 어떻게 가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우의를 꺼내 입고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동글동글한 돌길이 빗물에 젖어 미끄럽다. 숲 속이라서 더 컴컴한데 까마귀까지 따라오면서 까륵 까륵! 울어대니 마음이 심산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저 까마귀가 우릴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구나. 비가 그칠 테니 염려 말라 까르륵! 하고 들려왔다.
어느덧 걷다보니 주위가 밝아지고 하늘에 구름도 걷혔다. 금세 산뜻하게 개어서 산행하기에 그만이다. 물먹은 연초록 이파리가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며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한번도 산에 오르지 않던 윤기사가 오늘은 도저히 밑에서 쉬고만 있을 수 없는지 따라 나섰다. 기어코 정상까지 가고 말 자세로 등산화도 신고 배낭도 메고 나보다 앞서 올라간다. 나는 올라가면서 쉬는 곳마다 시간과 거리를 체크하며 올라가느라 조금 늦어졌다. 마지막 목재 계단 길을 줄지어 올라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거기서 보는 풍경은 언제나 최고다. 숨차고 다리 아플 때 잠시 쉬면서 뒤돌아 탁 트인 앞 바다를 바라보면 속까지 시원하다.
먼저 올라간 회원들은 11시도 못되어 올라가고 나를 포함한 후진이 11시 20분에 정상에 섰다. 구름 걷힌 파란 하늘과 먼 바다가 새파랗다. 아득한 수평선이 오늘은 더 멀리까지 보인다. 한라산 중턱으로 흰 구름이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백록담에는 물이 없어 기대에 못 미치지만 바람 한 점 없이 이렇게 좋은날, 남한의 최고봉인 한라산 정상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자축하며 기뻐했다. 나무 평상을 군데군데 깔아놓은 곳에서 도시락을 먹고 (12시) 관음사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제 길을 정비했는지 위험했던 길마다 목재 계단으로 길을 만들어놓아 걷기에 수월했다. 숲속에 하얀 고사목이 높은 산에 왔음을 실감나게 해준다. 왕관 릉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면 백록담을 둘러싼 화구벽의 절경이다.
용진각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출발했다. 개미 등에서 본 삼각봉은 하늘로 쏴 부칠 기세로 솟구쳐 하늘에 떠 있는 듯 높게만 보였다. 이 길을 두 번이나 지나갔어도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야 보고는 숨겨진 보물을 본 듯, 감탄, 또 감탄했다.
여기서부터는 전망 없는 숲 속 길로 내리막길이다. 잊어버리고 한없이 걸어야한다. 중간 중간에 거리를 표시해 놓은 이정표가 있어서 관리하는 분들에게 감사했다. 구린 굴 2시 40분에 통과, 종점에 도착하니 모두들 벌써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신에게 감사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이제 와 보다니.
피곤할 줄 알았는데 어젯밤 해수탕 사우나의 덕인지 거뜬하다. 영실에 도착한 우리는 마침 봉고차와 트럭을 만나 영실 휴게소까지 타고 들어가 바람에 산행이 순조로웠다.
콘크리트바닥을 밟고 40여분은 올라가야 하는 길을, 트럭을 타고 올라가니 모두들 신바람이 나서 웃고 떠들어댔다. 갑자기 보너스를 받은 기분인 것이다.
오늘도 쾌청한 초여름 날씨로 산행하기에 즐거운 날이다. 소나무와 참나무 숲 속으로 20여분 들어가면 가파른 돌계단이 시작된다. 땀 한차례 빼고 나면 영실기암의 절경이 눈앞에 와있다. 저 멀리로는 제주 시내와 끝없는 바다가 보여 시원하기 그지없으며 눈앞에는 개화기를 앞둔 철쭉꽃몽우리가 금방 터질 듯 부풀어있어 아름답기만 하다. 탁 터진 풍광과 시원한 바람을 잔뜩 가슴에 품고 나는 감격에 벅차 눈물이 핑 돈다. 이렇게 기쁠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한다. "여보! 나 지금 한라산 정상에 섰어요, 고마워요. 나 지금 무지무지하게 행복해요!" "그래? 조심해서 잘 다녀와." 나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혼자 떨어져 걷는다.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고 사색하며 이 대로 행복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걷다보니 주위는 온통 구상나무의 숲길이었다. 숲길을 빠져나오면 철쭉군락지인 대평원이 시야에 가득하다. 그 가운데로 목재데크 계단길이 산정까지 이어진 풍경은 아주 이색적이다. 철쭉은 아직 빨갛게 봉오리 진 상태로 있어 저 꽃이 다 핀다면 정말 장관이겠다. 위로는 백록담 화구벽이 둥그렇게 솟아 있어 위용 있어 보인다.
노루샘에서 목을 추기고 웃세오름새에 올랐다. 웃세오름새에는 통나무로 지은 대피소가 있고 간단한 음식물도 팔았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울타리를 쳐서 막아놓고 어리목으로 가는 등산로만 역시 침목으로 잘 정비해 놓았다. 이쪽의 만세동산, 사제비 동산의 평원은 더 넓었다. 1700고지에 있는 수 십 만평의 대 평원을 가로지르며 걸어가는 이 상쾌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 시간만은 영화 속의 멋진 주인공이 되었다.
사제비 동산을 지나고 숲 속에 들어서면 삼림욕장이 따로 없다. 가슴을 파고드는 시원한 바람과 싱그러운 5월의 풋풋한 풀 향기가 코를 자극시킨다. 돌계단 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힘들게 보인다. 반면 내려가는 우리는 이곳을 지나치기 아까워 일부러 쉬엄쉬엄 걸었다.
11시, 3시간 30여분 만에 어리목광장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고 산행계획을 세웠을 때는 5시간 잡았었는데 영실에서 트럭을 타고 휴게소까지 가는 바람에 시간도 단축이 되고 힘도 들지 않아 산행이 즐겁기만 했다.
이번 여행과 산행은 꽉 찬 일정에 알차고 보람 있는 시간들이었다. 비행기요금보다 몇 배나 싼 배를 타고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얻고 보니 더 값진 여행으로 여겨진다. (2004년 5월 20~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