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포토 에세이

설악산 공릉능선

산의향기(백경화) 2010. 11. 7. 20:07

설악산 공릉 능선. 1

필림사진을 스캔하여

  설악산은 갈 때마다 새로운 모습

 

새벽 2시 30분.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무렵, 차곡차곡 챙겨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1년에 한번씩 연중행사처럼 1박 2일로 설악산을 찾은 지도 이번이 여덟 번째다. 8년 전 정상인 대청봉에 올라서서 감격했던 일이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1박 2일 코스의 산행으로는 처음이었던 그때 얼마나 어려웠던지 한 회원이 “언제 또 오겠어?” 하는 말에 ”왜 못 와요 나는 앞으로 열 번은 더 올 거예요”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열 번은 아니더라도 몇 번은 더 오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앞으로 열 번을 채우면 다시 열 번에 도전하리라.

설악산은 언제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갔다 와서도 그 여운은 오래 오래 머릿속에 머물러 나의 생활에 활력소가 되곤 했다.

 

46명을 태운 우리 버스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어둠을 뚫고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어젯밤 모두들 한숨도 못 자고 나와서인지 모두들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 속에 빠져들었다. 나도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 보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보니 어느덧 자동차 소음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가 흘렀을까? 몸이 기우뚱 흔들려 눈을 떠보니 굽이굽이 대관령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6시 30분 경 강릉 시내와 함께 동해 바다가 펼쳐졌다. 이건 또 무슨 횡재인가? 바닷속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치며 뜻밖의 값진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오전 8시. 주차장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길고 긴 산행길을 시작하였다. 무거운 배낭을 매고 오르는 길. 발걸음은 가볍고 경쾌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비경을 지닌 비선대,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모처럼 자유로운 시간을 자연 속에서 한껏 즐기고 있었다. 찬 계곡물에 빠져서 물장난치는 남학생들, 그걸 보고 깔깔대며 웃는 여학생들, 모든 걸 다 잊고 천진난만한 개구쟁이가 되어 자연 속에 풍덩 빠져, 웃고 즐기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천불동 계곡, 천의 바위가 잘 다듬어진 부처님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름 만큼이나 많은 아름다운 바위가 오색 단풍과 한 데 어우러져 극치를 이룬 모습은 단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설악산은 우리 나라에서 최고로 멋진 산으로 꼽힌다. 외국의 산도 몇 군데 가 보았지만 설악산만큼 웅장한 암벽과 암봉, 수려한 계곡이 있는 아기자기한 산은 없었다.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어 항상 좋았다. 칭찬과 감탄사가 절로 나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힘든줄도 모르고 여섯 시간이나 걸려 휘운각 대피소에 도착했다. 큰 방 하나에 46명이 짐을 풀고 밥을 하고 된장도 끓이고 아침까지 준비해 놓았다. 숲 속에 묻힌 움막 같은 산장, 바로 앞에는 암석과 암반으로 된 웅장한 계곡이 있었고 돌 틈새로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두워지니 미처 내려오지 못했던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내려와 산장을 찾았다. 호롱불 두어 개가 의자 위에서 산장을 밝히고 그 불빛 아래서 라면과 캔맥주로 시장끼를 때우는 모습은 낭만적으로 보였다. 높은 산과 빽빽히 들어선 숲 위로 보이는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일렬로 나란히 발을 맞대고 차디 찬 방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니 방바닥이 오히려 내 등의 덕을 보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새우잠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밤이슬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새벽 6시. 설악산에서 제일 힘들다는 공룡능선으로 출발했다. 30여 분 능선을 올라 일출을 보았다. 구름도 안개도 없는 하늘에 떠오르는 햇빛은 눈부시고 찬란했다. 흐리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왔는데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라고 서로 자축하며 기뻐했다. 공룡능선은 우리가 올라온 천불동 계곡과 가야동 계곡의 줄기로써 굴곡이 심하여 매우 가파로웠다. 그리고 양쪽의 경치가 훤이 다 내려다 보이며 멀리로는 화채능선, 중청봉, 서북능선이 보였다. 바로 건너편에는 날카로운 이빨 모양으로 보이는 용아장성 능선이 한 눈으로 보이는 전망이 제일 좋은 곳이었다. 오른쪽 산 밑에는 뾰쪽뾰쪽 하늘을 보고 서 있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석순이 자라난 듯 앞다투어 나란히 서 있다. 특히 왼쪽의 가야동 계곡은 바위와 단풍이 어우러져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 고개 올라서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지루한 줄 모르고 몇 개의 큰 봉우리를 넘었다.

마등령에 못 미처 오세암 갈림길에서 점심을 먹고 오세암으로 하산하기 시작하였다. 걸어온 길과는 정반대로 길이 육산으로 되어 있어 걷기에 편해진 탓인지 다리의 피로가 한층 풀리는 듯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양폭산장에서 자고 새벽 3시부터 걷기 시작하여 마등령에서 금강굴, 비선대로 하산했는데 층층대를 내려 갈 때 얼마나 다리가 아팠든지 다리를 질질 끌여 13시간이나 걸려 내려갔던 기억이 떠올라 비교가 되었다.

 

수렴동 계곡의 맑은 물과 경치를 따라 내려오는데 얼마나 물이 맑은지 보기만 해도 내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아홉 시간이나 걸려 백담사에 도착하여 혹시 우리 차가 와 있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졌으나 역시 우리라고 예외는 없었다. 그 곳에는 민간인 차는 전혀 들어오지 못했고 예약된 신도들만이 절의 차로 다니는 곳이라서 아무리 사정해도 빈 차로 나갈지언정 우리를 태워주지는 않았다. 사오십 분을 걸은 후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우리 차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에 닿을 수 있었다.

암반 위로 흐르는 백담사 계곡물은 언제 보아도 거울 속을 들여다 보듯 맑고 아름다웠으며 붉은 물이 금방이라도 줄줄 흐를 것만 같은 단풍나무 역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산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산을 보고 생각하는 느낌도 다르다. 내년에 또다시 찾아가면 그때의 느낌은 또 새로워지겠지. 긴 여운을 남겨 놓은 설악산이여! (1995. 9.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