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묻힌 한라산- 산행기
폭설로 묻힌 한라산을 오르며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에 가면 네 번 다 새로운 산을 볼 수 있다.
지난 오월 말 철쭉꽃 필 무렵에 한라산 등반을 이틀간에 걸쳐 성판악-관음사, 영실-어리목 이렇게 4코스를 완주하고 감격에 찼었다.
그리고는 겨울이오면 다시 와서 하얀 겨울 산을 보리라 마음으로 굳게 약속했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한라산에 폭설이 내려 통제시켰다는 뉴스를 보고 이제 雪山을 등산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1월 11일 날 지난 5월과 마찬가지로 새벽에
목포항으로 가서 배타고 들어가 이튿날 한라산 등반을 하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신비한 비경에 심취되어 가슴 벅찼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
1월 12일 새벽 7시, 성판악에 도착했다. 먼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는지 온통 캄캄하다. 날씨 또한 쌀쌀하여 목이 잔뜩 움츠려든다.
하얀 눈으로 덮힌 성판악 광장에 매서운 찬바람이 쌩~하고 소리 내며 매섭게 지나간다.
옷매무새 꼭꼭 여미고 얼굴만 내놓고 산길로 들었다. 캄캄하지만 눈길이라서 전등 없이도 길이 훤하다. ‘어석어석’ 눈 밟는 소리가 정적을 깨며 정겹게 들린다. 아이젠을 끼지 않아도 전혀 미끄럽지 않은 눈은 발바닥을 포근하게 감싸주기까지 한다.
얼마나 많이 온 눈일까? 쌓인 눈을 스틱으로 짚어보니 한없이 들어가며 내 손등까지 들어간다. 무척 많이 내린 눈이다. 돌계단길도 눈으로 다져져서 아예 평길이 되었다.
두 시간쯤 올라가면 사라다 대피소. 여기서부터는 온통 나무가 하얀 눈꽃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침묵에 잠겨있다.
올라갈수록 눈을 잔뜩 뒤집어 쓴 나무들은 서로서로 부둥켜 안고 하나의 빙산이 되어 웅장하고 엄숙했다. 작은 나무들은 바닷속의 하얀
산호초 모양과 사슴뿔처럼 물결을 이루고 왠만한 바람이 뒤흔들어도 끄떡없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있었다. 다른 때는 우리가 지나가면 놀라서 푸다닥 대고 날아가던 새도, 까욱! 까욱 하며 따라다니던 까마귀도 어디로 다 피신을 했는지 산속이 아주 조용하다.
움직이는 것은 오르지 날아다니는 구름뿐이다.. 여기서는 아무소리도, 말도, 필요 없다. 모든 것 버리고 빈 마음으로 내게 준 이 선물을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받아드리자. 내가 찾고 바라던 것이 이 맑고 깨끗함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눈부신 햇살이 이러한 설경을 시샘이라도 하는지, 찬양하는지 마구 쏘아 부친다. 거기에 반사되는 세상은 더 반짝반짝 빛나며 찬란하다. 구름까지 등장한다. 마치 하얀 드레스 자락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선녀들처럼 산을 가리다가 보여주다가 심술을 부려도 그 모습 밉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침목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오르막길,
이곳 역시 눈으로 덮여서 계단의 흔적이란 목침을 세워 연결한 것만 눈 속에서 말뚝처럼 서있다. 이 말뚝같이 서 있는 곳에 옆으로 뾰족뾰족하게 얼어붙은 눈덩이는 바람이 가져다준 걸작품이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또 한번 놀란다. 바로 산 아래에서는 가닥가닥 흘러내린 머릿결이 흐느적거리듯 보이는 운무가 위로 펴 오른다. 눈의 섬세한 모양이 있듯 구름도 그렇다는 것 이제야 보고 알았다.
4시간만에 정상의 백록담 난간에 섰다. 바람이 회오리를 치면서 눈발을 몰고 다닌다. 북벽 쪽에서 백록담 안으로 구름이 쏙 밀려들어왔다가 금방 남쪽으로 달아난다. 바닥이 훤이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둥그런 분지다. 둥그런 백록담의 서북벽이 텅 빈 분지를 내려다보며 쓸쓸해한다. 그때 또 하얀 구름이 미끄럼을 타듯 들어오더니 쏜살같이 빠져나간다.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쫓고 쫓으며 뭉쳐 다닌다. 이런 풍경을 지켜보는 등반객들은 감탄할 세도 없이 카메라 셧터만 눌러댄다. 아! 이 대자연, 정말 신비하다. 모든 것 다 내어주고 하얀 눈덩이 뒤집어쓰고 묵묵히 있는 산, 저 구름, 바람, 내 영혼의 친구들, 오늘따라 더 다정하고 포근하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 한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속도를 내서 내려왔다. 진달래 대피소로 들어가서 컵라면 한개 사서 뜨거운 국물과 싸준 도시락을 꺼내서 먹고 대피소에서 나오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나가는 입구에 쌓아 논 쓰레기 더미가 보인다. 아직도 쓰레기를 산에 두고 가는 사람이 있다니..... 조금 전 즐거웠던 마음에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내려오면서 누가 말했다. 한라산의 설경을 보는 순간 집사람이 제일 먼저 떠올라 전화를 했다고, 또 누군가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해야 알겠느냐고. 나도 겨울 산을 수없이 다녀보았다. 함박눈이 오는 날 눈속을 헤치며 무릎까지 빠지며 올라간 선자령산, 산 전체가 산호초 모양의 설화로 장식했던 태백산, 고사목에 덕지덕지 옷 입혀서 뚱뚱해졌던 소백산, 나무에 유리구슬 주렁주렁 달아 놀라게 한 광양의 백운산, 그밖에 생각지도 않았던 산에서 보너스를 듬뿍 받고 어쩔 줄 몰라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이제 또 하나의 색다른 추억을 안고 돌아간다. 평생동안 잊지 못할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