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포토 에세이

결혼 25주년에 남편과 여행과 산행

산의향기(백경화) 2013. 1. 19. 20:57

 

결혼 25주년에 남편과 3박4일 여행과 산행

 

오늘은 금산, 내일은 가야산, 모레는 내장산 계획을 세우고

 

 1994년 12월 14일.

이제 산에 다닌 지도 3년. 일주일에 보통 2번씩은 다녔으니 전국의 산을 꽤 많이 다닌 편이다.

산에 미치다시피 일주일에 두 번씩은 갔다와야만 살림을 반짝반짝하게 잘 하는 여자가 결혼 25주년 핑계로 남편을 부추겨 둘이서는 처음으로 3박 4일 간의 휴가를 얻어 여행길에 나섰다. 여행이라기보다는 그 동안 시간이 없어 가고 싶었던 산을 못 가 아쉬워했는데 이번에 실컷 명산을 찾아 등산하자는 심산이었다.

 

등산 장비 일체를 차에 싣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전남 남해 끝에 있는 금산, 내일은 가야산, 모fp는 내장산. 계획을 세우고 하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차창 밖에 스치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도 손을 흔들어 보이며 모처럼 나들이 나온 우리를 축복해 주었다. 그 동안 전국에 있는 모든 산을 찾아 등산하였으니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운전 솜씨를 힘껏 발휘해서 그이를 기쁘게 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사진: 가야산 만물상

 

 

 

어느덧 광주를 지나고 남해고속도로를 달린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남해로 나가 1시간을 더 달려 금산에 다다랐다. 먼저 우리가 묵어야 할 호텔을 찾았다. 그러나 호텔은 없고 산장만이 우릴 기다렸다. 남편은 금세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하더니 “호텔이 있다며 그런 것도 모르고 왔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산장이면 어떼요, 너무 좋구만. 언제부터 호텔을 다녔다고…….” 나도 순간 화가 나서 말을 되받았다. 잘 모르는 길 다섯 시간을 눈비 속에 운전하고 온 아내에게 기껏 수고했다는 말은 고사하고 핀잔을 하는 남편이 너무 야속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랜 만에 부부가 여행을 가면 집에 돌아올 때는 각각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내가 그 꼴이 되는 것은 아닌지……. 남편은 갑자기 “산장으로 갑시다!”하고는 앞장서서 짐을 들고 산장 안으로 들어갔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와서 차를 타고 상주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로 갔다. 조금 전의 서운했던 마음이 남아 혼자 바닷가 모래 위를 걸으면서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 쉬며 답답했던 가슴을 토해냈다. 그이는 한발 뒤에서 따라오다가 어느새 내 곁으로 와서는 멋적게 팔짱을 끼며 “미안해! 나는 당신을 제일 좋은 호텔로 데려가고 싶었어.” 하고 말했다. 나는 남편이 말을 하기 전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화가 풀어져 있었고 모처럼 여행온 남편을 실망시킨 점 때문에 잠시 마음이 아팠다.

나는 금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남편의 팔짱을 끼고 속삭이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결혼한 지 25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이렇게 둘이서 오붓하게 여행하기는 처음이니 감회가 새로웠다.

 

 

 

12월 15일 둘째날.

이튿날 아침 8시 30분. 계획했던 대로 山行은 시작되었다.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 가지고 금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이른 시각이어서 인지 우리 둘 뿐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도란대는 소리와 돌멩이 밟는 발자국 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다닥 거리며 날아갈 때 우리가 깜짝 놀랐다. 모처럼 도심을 벗어나 한적하고 한가로운 길을 걸으니 그이도 즐거운 기색이었다.

암석과 암봉으로 된 산, 여기저기 매끄럽게 깎아 세운 듯한 바위, 둥글넓적 바위, 남편은 신기한 듯 나를 이리저리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봉화대처럼 돌로 쌓아올린 정상에 올라섰다. 쫙 펼쳐진 남해가 휘뿌연하게 아침을 맞는다. 상쾌한 기분이다. 어제 거닐었던 상주욕장의 하얀 백사장과 짙푸른 해송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물속에 떠있는 작은 섬들, 먼 바다로 나가는 어선들, 그이는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칠세라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아름다운 선경 속에 자리한 보리암과 부처님 사리탑에 가보았고 12시에 산에서 내려왔다.

곧바로 지도를 보며 해인사로 향했다. 남해, 구마, 88고속도로를 번갈아 달려 해인사 여관촌에 도착하였다. 조금은 지쳐있는 터에 우릴 안내하는 사람있어 따라가니 방이 깨끗하고 전망이 좋아 잘 쉬었다.

 

 

 

12월 16일 셋째날.

아침 8시. 비상식품과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넣고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가야산 정상을 바라보며 산행은 시작됐다. 잣나무가 많아 더러는 잣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1시간 쯤 가니 온 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어제는 남쪽이라서 포근했는데 오늘은 춥고 바람도 차가웠다.

정상이겠지 하고 오르면 또 큰 산이 눈 앞에 있고 갈 수록 태산이라더니, 이 산을 두고 한 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막다른 고개에 올라서니 산 전체가 웅장한 큰 바위산이었다. 마치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있어 무척 강렬하게 보였다. 어쩌면 그렇게 얼마 전에 오른 매화산과 마주보며 조화를 이루었을까. 매화산은 올망졸망 바위들이 아름답게 모여 꽃이 핀 듯 유순한 여자산이고, 가야산은 강하고 장엄하게 버티어 있는 폼이 남자산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미끄러운 눈길을 어렵게 올라 마지막 사다리를 타고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이 높은 산 위에 우리 둘만이 서서 온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때 보다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 무척 추웠다. 그이가 입은 얇은 방수복의 내부가 꽁꽁 얼어 더그락댔다. 주위는 너무 조용하고 보이는 것은 시커멓게 하늘만 보고 서 있는 바위와 길도 보이지 않는 하얀 눈 뿐이었다. 나는 조금은 겁이 나서 하산길을 서둘렀다. 헬리콥터가 우리 위를 몇 번이나 맴돌며 우리를 주시하는 것 같아 안심은 되었다.

 

 

 

 

잠시 후 아래 쪽에서 등산객 5-6명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척 반가웠다. 금세 무서웠던 마음이 없어지며 온몸의 추위도 풀렸다. 1시경 해인사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그때서야 등산객들이 줄을 이어 오르고 있었다.

 

2시에 내장산을 향해 출발했다. 88고속도로로 진입해 한적하고 깊은 산 속을 한없이 달렸다. 영남, 호남, 남해 일대의 고속도로를 누비며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드라이브의 즐거움도 매우 컸다.

어느덧 남원-순창, 산중이라서인지 4시 30분인데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갈 길이 바빴다. 쉴 겨를도 없이 이정표를 보며 달렸다. 캄캄한 밤 꼬불꼬불한 내장산 뒷길의 내리막이 꽁꽁 얼어 운전하는 데 힘들어서 진땀을 뺐다.

목적지인 내장산에 도착하여 쉴 곳을 찾았다. 겉으로 보아도 깨끗하고 우아한 한옥으로 들어갔다. 저녁식사는 어느 곳보다 식탁이 풍성했고 맛도 좋았다. 경상도 음식보다는 전라도 음식이 우리 입맛에 꼭 맞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인지 5시간 넘게 산행하고 4시간을 운전하였으나 별로 피로한 줄 모르고 행복하기만 하였다.

 

 

 

 

12월 17일 마지막 날.

아침 9시. 내장산에도 눈이 많이 쌓여 등산은 조금만 하기로 하고 일주문까지 걸어가서 케이블카로 산에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30분 정도 산에 올라갔다가 눈이 많이 쌓이고 길도 나지 않아 위험해서 포기하고 전망대로 내려왔다. 전망대에서 보는 내장산은 삥 둘러 7개의 봉우리가 병풍을 쳐놓은 듯 아름답기만하여 오늘은 일곱봉의 산을 감상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기로 했다.

3박 4일간의 짧은 일정에 홍길동처럼 동서를 가로지르며 여행과 등산을 한꺼번에 무리 없이 끝냈다. 첫날의 트러블로 남편과 의 정은 더욱 깊어졌고 알차고 보람있는 시간들이었다. 이런 것들이 幸福이란 것이겠지하고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1994. 12.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