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등반에 만난 교포 청년
백두산 등반에서 만난 교포 가이드
1999. 8. 16~21.
우리는 한국을 아버지 어머니라 부른다.
중국의 선양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대합실에서 나오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가이드가 팻말을 들고 서있었다. 우리를 보자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미리 대기한 전세 버스로 안내했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청년은 선양의 변천사와 발전한 시가지를 소개하며 자랑하듯 신이 나게 설명하는데 말할 때마다 우리 중국은... 우리 선양은.... 을 꼭 붙이며 억양이 강한 북한 사투리로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으로 들렸던 이북 말이 낯선 중국 땅에서 들으니 저런 사람이 말로만 들었던 그 조총년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우리는 몇 시간 후 선양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연길로 가는 바람에 그 가이드와 헤어지고 다시 젊은 청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피곤하시지요?” 귀에 익은 우리 인사말 그대로였다.
그 청년도 버스로 안내하고는 오르자마자 짜인 각본대로 그곳의 역사와 지리, 우리 조선족에 대하여 유창하게 말했다. 그 청년은 우리 중국, 우리 선양이라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우리 한국은……. 여기 중국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며 완전히 서울 표준말을 썼다. 물어보진 안 했지만 그의 할아버지께서는 자손들에게 한국말을 똑똑히 가르쳐 준 것이 틀림없었다.
중국에는 우리 조선족이 200만 명이나 살고 있는데 그곳 연길시에만도 3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곳 연길의 거리는 한국에 있는지 중국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상가의 간판도 모두 한국 간판 그대로이고 아래에 조그마하게 중국어로 토를 달았다.
나는 내심 놀랐다. 이렇게 많은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고 살기까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그리운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족들의 소식조차 모르고 살 때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을까? 이곳에 와서 그들을 직접 보고 나니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고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어 기쁨은 잠시고 오도 가도 못하는 남의 나라에서 내 조국, 내 고향, 내 가족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말만 듣던 때와는 달리 그 사람들을 직접 대하고 나니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고 그들 모습에도 그리움이 배인 듯 우수가 가득 차 보였다.
그래도 그들은 언젠가는 고국땅에 와 보고 가족을 만난다는 희망 속에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리다 가슴에 숯덩이만 남긴 채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잔뼈를 묻고 사는 이들이 상당수가 있을 것이다.
젊은 가이드가 “우리는 한국을(남한과 북한)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른다. 부모들이 서로 싸워서 잠시 헤어져 있으며, 부모들이 빨리 화해해서 찾아주길 기다리며, 버린 자식이 되어 1세기를 살아왔다. 이제는 이곳 우리 조선족들은 홀로 서서 똘똘 뭉쳐 열심히 잘 살고 있다. 부디 고국에서 부끄러운 소식 들리지 않게 살아 주신다면 우리는 더욱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 있는 말을 할 때 그의 눈동자는 빛이 나고 애수에 찬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뭉클하여 콧등이 찡해 왔다.
입은 옷 벗어주고 여행가방, 등산화 모두 주고.
그런 말을 열심히 하고 듣는 가운데 용정의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마을에 닿았다. 이 마을은 우리나라의 두만강에서 얼마 안 떨어진 우리 민족만이 사는 산촌의 농가 마을이었다. 언뜻 보아도 농사만 지어 생계를 하자니 어려웠던 우리의 과거가 아닌가 싶었다.
들어가는 길목의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초라한 노인이 보였다. 나는 작품 사진을 찍어보려는 요량에 “할아버지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물으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길래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늦게서야 알고는 ‘내가 잘못했구나’ 싶었다. 저 노인도 젊은 시절에 무슨 사연이 많았겠지,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정신을 빼앗겼을까. 누구에 의해서 저리 되었을까? 너무나 불쌍하고 빈곤해 보여서 “할아버지 이걸로 맛있는 과자 사 잡수세요”하고는 돈을 드리니 얼른 받으셨다.
나는 윤동주 詩人의 생가에 가서 공적비를 보고 방명록에 사인하고 나오면서, 나에게도 조금은 애국심이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번 여행에서 다섯 명의 가이드와 6일 동안 같이 지냈다. 한 청년만 이북 말씨였고 네 사람은 서울과 경상도 말씨여서 가까운 친척을 만난 듯 친절하게 잘 지냈다.
우리 3세들이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무척 예뻐 보였고 부모 자식 간의 나이로 만나 금세 정이 들어 자식같이 사랑스러웠고 미더워 보였다. 떠나올 때 그들과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씩씩하게 살아요.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고 찾아와요. 입은 옷 벗어주고, 여행가방과 등산화도 벗어주고, 비옷도 주고, 싸 가지고 갔던 초콜릿, 고추장, 라면, 모두 모아서 가방에 담으니 큰 가방에 차고 넘쳤다. 어찌 그뿐이랴, 인정과 사랑과 애국심도 가방에 가득 차고 넘쳐서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