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날, 조령산
잊을 수 없는 그날, 조령산
(산행기)
어느 해였던가 3월이다. 내가 대전 YWCA 산악회의 회장직을 맡고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할 때, 눈이 많이 내린 날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눈이 오면 좋아한다. 그날도 3월인데도 뜻밖에 내륙지방에 눈이 많이 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하얀 눈을 밟으며 산행할 수 있겠구나 하며 설레는 가슴으로 출발했다. 종주할 코스는 충북 연풍면에 있는 이화령 고개에서 시작하여 경북에 있는 문경새재 제3 관문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우리 25명의 회원은 이화령 고개에서 내려 하얀 눈이 쌓인 산길로 들어서 조령산(해발 1,125m)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만한 길로 시작해서 별 어려움 없이 40여 분 만에 헬기장에 도착했고 다시 20분 올라가서 조령 샘에 닿았다. 거기서 정상까지는 왼쪽으로는 아스라한 낭떠러지고 오른쪽으론 쭉쭉 뻗은 잣나무 숲이 이어지고 30여 분 지나서 조령산 주봉인 정상에 도착되었다.. 삥 둘러 온 천지가 산으로 둘러싸인 우뚝 솟은 산정에서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는 기쁨을 시원하게 맛본다. 뒤돌아 10시 방향으로 백화산 줄기의 대간 길이 한 눈으로 보이고 오늘 우리가 가야 할 대간 길은 울퉁불퉁 시커멓게 조금은 사나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시 등산화 끈을 조이며 길고 험한 길을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왔다는 한 산악회서 30여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험한 산을 앞에 두고 또 다른 팀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급경사 내리막길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눈 속의 빙판길에서 아이젠 없는 회원이 있어 내려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내 아이젠을 한 짝 벗어 주며 둘이 한쪽씩 끼고 걸으려니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꽁꽁 얼어서 한 발짝도 옮기기 어려웠다. 다행히 서울에서 온 남자 등반대장이 붙잡아 주어서 안전하게 안부에 내려섰지만 더 이상은 아이젠 없이 갈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한 고개 넘었는데 앞으로도 이런 길이 계속된다면 안 되지 싶어 아이젠 없는 회원은 신풍리라는 마을로 하산시켰다.
같이 가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나는 앞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십 여전 전에 한 번 왔던 기억이 있어 우리쯤은 무사히 갈만한 코스로 생각하며 앞서간 회원들을 따라갔다. 뾰족한 암봉에 올라서니 회원들 모여 섰다. 웬일인가? 했더니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생사를 넘나드는 시발점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어젯밤에 내린 눈이 녹다가 새벽 찬 기온에 꽁꽁 얼어서 완전히 얼음 계곡에 빙벽이 되었다. 가까스로 가느다란 밧줄을 잡고 내려가니 다시 오름길, 한 봉을 지나고 나면 또 위험한 길이 도사리고 몇 번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젠 전진하기도 어렵고 후퇴하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위험지대인 신선봉을 지나칠 때는 바위에 오르지를 못해 아래의 위험지대 <등산로 아님>'도 돌아왔다. 바위를 오르는 길이 눈이 쌓이고 얼어서 도저히 시도도 못 하고 위험지대로 온 것이다. 미끄러운 바윗길인 데다 아래는 수 백 리 낭떠러지, 몸을 안으로 기대며 죽을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이곳에서 엉엉 우는 회원이 몇이나 있어 겁이 덜컥 났다.
간신히 올라가면 가느다란 줄 하나에 생명을 걸고 내려가야 하는 가냘픈 목숨이 되었다. 줄을 놓치면 수 백 리 낭떠러지, 떨어지면 누가 내려가서 끌어올 수도 없는 수백 미터 직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갈라진 바위를 건너뛰는 아찔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각자가 죽기 살기로 힘내며 안전하게 잘 이동했다.
어떻게 하던 빨리 이곳을 탈피해야만 하지만 가면 갈수록 끝나지 않는 험로가 이어지니 질력이 났다.
전망이 좋은 작은 산봉에 섰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궁금했다. 깊은 산중의 능선에서 여태껏 이정표 하나 못 보았으니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는 4~5시간 걸리는 코스인데 여기까지도 6시간 반이 걸렸다. 거의 다 온 듯싶어 두리번거리며 무엇이든 찾았다. 그런데 119 표지판이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신선암이라니? 그러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 아닌가? 하는 수 없다. 전진하는 방법 이외는 아무런 묘책이 없다. 다시 힘을 내어 줄도 없고 잡을 곳도 없는 높은 바윗길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기어올랐다. 그런 길로 1시간 30여 분을 가고 나서야 우리가 하산할 지점, 깃대봉 갈림길인 삼거리가 나왔다.
여기서 모두 모여 인원 파악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길로 경사가 심하지만, 나무가 많아 붙잡을 곳이 있어 빨리 내려올 수가 있었다. 나무 사이로 넓은 신작로가 보이고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젠 살았구나. 기어코 살아왔구나. 조령 3 관문이 보이자 발이 더욱더 빨라졌다. 드디어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내려오니 조용하고 한적한 조령 3 관문이 우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약수터의 얼음물을 한 바가지 씩 떠서 단숨에 마시고는 아이젠 벗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버스 주차장까지 2km라고 써놓은 이정표를 보고 우린 걷기 시작했다. 그때야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얘기도 나누면서 40분을 와서야 우리 버스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동안 산행 경험으로 보아 고생은 각오했지만 웬만한 산은 자신했었다. 그러나 3월인데도 땅이 그렇게 꽁꽁 얼었을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런 일은 산행 경력 20여 년이 다 되었지만 처음 있는 일로 좋기만 하던 산이 이렇게 무서울 때도 있다는 걸 느끼며 반성했다.
나는 이번에 등반하고서 우리 인간에게 분명히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떻게 9시간 동안 위험한 산행을 하면서 지치지 않고 힘이 솟아났는지, 그리고 그 많은 위험 코스에서 아무 사고 없이 무사했는지, 하나님이 도와 주셨는지 산신이 도와 주셨는지 누가 도와주지 않고서야 이렇게 모두 무사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되었다.
회원들한테 미안했다. 산이 나에게 앞으로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준 것 같다.
아무튼 고생은 했지만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와서 다행으로 생각하며 원망스러운 눈빛 하나 없는 회원들한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