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화원 덕유산
천상의 화원을 거닐다.
나는 덕유산을 무척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덕유산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간다. 봄이면 향적봉에서 중봉까지의 연분홍 철쭉꽃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여름이면 동엽령에서 중봉까지의 원추리꽃과 야생화로 뒤덮은 산길을 걸으며 가을이면 남덕유산의 기암괴석과 단풍의 어우러짐을 보며 겨울이면 향적봉에서 넓게 펼쳐진 산 그리매와 고사목의 설화를 보며 감상에 젖는다.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다음으로 높은 해발 1,614m 나 되는 육산이다. 높은 산이지만 그 품속에 들어서면 편안함이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평온하다. 그러나 등산을 하자면 어느 코스를 택하든지 최단 거리가 왕복 7~ 8시간은 걸린다. 지금은 케이블카가 있어 향적봉 정상을 30분 이내로 오를 수 있지만 곤돌라 시설이 없을 당시는 종일 걸어야 했다. 요즘은 하루에 많은 거리를 걸을 때 남덕유산에서 무룡산으로 향적봉으로 하루에 여러 봉을 등산할 때는 하산 시 이용하는데 좋은 점이 있다.
오늘은 동엽령에서 중봉 사이의 원추리꽃과 야생화를 보기 위해서 전북 무주군 안성면 칠연폭포 쪽으로 올라가 경남 거창의 송계사로 내려가는 코스를 정했다.
처음부터 숲이 울창한 산길로 들어선다. 7월의 장마 끝이라서인지 숲 속이지만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그러나 계곡물은 웅장한 폭포 소리를 내며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이어지다가 힘든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두어 시간 오르고 나면 동엽령(해발 1,320m ) 삼거리에 올라선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푸른 하늘이 보이고 시원한 바람은 어느새 달려와 온 몸을 감싸 안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동엽령의 넓은 초원 위에는 만발한 야생화로 꽃 잔치가 벌어졌다. 노랗게 핀 원추리꽃, 주황색인 산나리 꽃, 빨갛게 핀 싸리나무 꽃, 하얀 취 꽃, 엉겅퀴꽃, 그 밖에 많은 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이런 꽃들이 바람 따라 유연하게 파도를 친다. 거센 파도를 거역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나 하듯 오히려 즐기면서 넘실거렸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도 오색의 물결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춤추는 물결 위로 새 한 마리 앉으려다 파드득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삐리 삐리 삐리리 노래하면서 빙빙 하늘을 날고 있다. 나비와 잠자리 떼들도 덩달아 바쁘게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풍경에 이런 곳을 일러 천상의 화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왼쪽은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이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선이다. 또한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이곳 덕유산을 지나는 백두대간 길이다. 오늘 정해진 산행 코스는 여기서 잠시 덕유산의 백두대간을 밟다가 경남 거창의 송계사로 하산한다.
능선 길로 들어섰다. 길가에 채송화꽃처럼 작은 빨간 꽃이 삐쭉 고개를 쳐들고 나와 저도 한몫하겠다며 애교를 떤다. 보라색 옥잠화 꽃봉오리는 몽글몽글 금방 터트릴 기세로 준비되어 있다. 송계 삼거리 봉을 못 미쳐 오름 길에는 또다시 원추리꽃으로 노란 물결을 이루었다.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정원의 소담스러운 장미꽃이나 국화꽃이 이보다 더 아름답겠는가? 모진 세파를 잘 견디는 강인한 내면과 겉으론 한없이 순수하고 연약해 보이는 야생화의 그 자태는 이 세상 어머니들처럼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2010. 7. 10.) 산행시간 7시간 정도.
야생화에 반해 멀리로는 눈 돌릴 겨를도 없이 어느덧 해발 1,500m가 넘는 송계 삼거리에 올라섰다. 바로 위로는 중봉, 그 옆으로는 정상이 가깝게 올려다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정상을 못 가는 게 아쉬워 자꾸 그쪽을 쳐다본다. 그러나 오늘 계획한 코스는 향적봉을 뒤로하는 반대 방향이다. 내가 밟고 온 길과 남덕유산으로 뻗은 짙푸른 능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울툭불툭 구불구불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처럼 위용스럽게 다가왔다. 무룡산과 삿갓봉, 남덕유산의 산봉들이 키를 재고 있듯 뾰쪽뾰쪽 다투어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남쪽으론 하늘과 맞닿은 지리산이 장쾌하게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장대한 능선 100리 길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바로 옆으로는 내가 하산할 송계리 능선도 길게 펼쳐있다. 나는 이곳 송계봉에서 느긋하게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적어도 이 시간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자처하며 요리조리 세상을 굽어 살펴보며 행복감에 젖어본다.
산에서는 언제나 긴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송계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중봉과 향적봉을 뒤로한 채 계속 백두대간 길을 겯는다. 능선이지만 여기도 하늘 한 점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 속이 이어진다. 두어 시간 정도 못 미쳐 걷다 보면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백두대간 길을 벗어나 송계사로 향한다. 갑자기 마사가 깔린 험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미끄러질까 봐 긴장을 해서인지 천천히 내려왔지만, 겉옷까지 땀으로 흥건히 적시며 한 세 시간 정도를 내려왔다. 거의 다 내려와서는 같이 간 회원들 여러 명이 땅벌에게 쏘였다.
산길을 걷다 보면 종종 흙이 부스스하게 소복이 쌓이고 쥐구멍만 하게 뚫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이 벌집이다. 그런 것이 발견되면 밟지 말고 살짝 피해가야 한다. 모르고 밟았다 하면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놓는 격이 된다. 벌은 나무나 숲 속에 집을 짓고 사는 줄 알았는데 산에 다니다 보니 쥐구멍 같은 곳에서도 벌이 산다는 걸 알았다. 오늘도 앞서가는 회원이 부스스한 땅을 벌집인 줄 모르고 밟고 지나갔다. 밟고 지나간 후 벌떼들이 모두 나와 공격을 했다. 산길이라서 좁고 험해서 피할 수도 없이 당했다. 어떤 회원은 아프다는 다리에 벌에 쏘여 벌침 맞아 약이 되겠다면서 웃으며 내려오기도 했다. 등산을 하다 보면 벌에 쏘이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 명 중의 한 명이 심각한 상태여서 병원까지 들렀다 왔다.
언젠가도 빈계산 등산 중에 회원 중 하나가 갑자기 벌떼를 만나 피하느라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손을 땅에 짚는 순간 유감스럽게도 손가락이 뒤로 꺾이어서 119를 불러 병원에 가서 수술받은 적도 있었다. 산에서 벌을 만나면 가만히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가버린다.
산에 오래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때가 거의 하산 종료 직전에 생긴다. 등산은 완전히 산행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멈춰서는 안 되며 기쁜 일이 있으면 더 긴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오늘, 꿈만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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