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포토 포엠

꿈과두레박 동인지 제 16집에서.....

산의향기(백경화) 2011. 11. 24. 21:51

 

 

 [꿈과 두레박 동인회] 제16집 작품집에서 한 편씩 소개합니다.

 

사진: 보문산의 늦가을 

 

 

 

권예자

 

 

저년, 저 염치없는 년

문주란 화분에 몰래 들어와

주인행세하는

 

저녁이면 색조화장으로

붉고 노란 얼굴 만들고

요염한 몸냄새로

목석 같은 남정네 꼬드겨

날밤 새우는

 

해 뜨면 요조숙녀인 척

가는 목 길게 빼어 입 꾹 다물고

고개 숙이는

 

민망한 듯 건네준

검은 사리 몇 알에도

분가루를 몰래 감추는

엉큼한 저년

 

 

  분갈이

 

박현숙

 

 

화분이 터질 듯 꽉 찬 난

난속에 물 붓고 조심스레 엎는다

뿌리는 세상 나오기 싫은 걸까

쉽게 나오지 않는 뿌리

거꾸로 겨우 들어내니

얼기설기 엉킨 지하철이다

어떻게 비좁은 세상 살았는가

뿌리 갈라 본다

몇몇 쭉정이 버리고 알뿌리만 모아

두 개 화분 만든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티비뉴스

"정부 기관들 곧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로 이전 공무원 대다수가 서울을 떠납니다"

 

 

어디쯤 가고 있는가

 

백경화

 

 

캄캄한 성판악의 새벽

완전무장한 등산객들 하나 둘씩 모여든다

날쌘 바람

얼굴을 알싸하게 치며 짖궂게 인사한다

뽀드득 뽀드득 하얀 눈 밟히는 소리

정감있게 들린다

손전등으로 비친 세상

온통 다이아몬드 세상이다

눈속에 빠져드는 등산화

발등까지 차오르는데

발바닥은 포근함마저 든다

하늘엔 별들이 가고 나도 가고

갈길은 멀고 마음은 벌써 다 가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침

 

이선

 

 

무채를 썰다 손을 베었다

손을 감싸 쥐고

원망스런 눈빛으로

칼끝을 노려본다

바르르

눈꺼풀에 경련이 일 뿐

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할 뿐이다

 

상처를 낸 것은

칼날이 아니다

시퍼런 칼도

스스로 상처 내지 못한다

가끔

무 한 쪽 베지 못한 칼

밤새도록 간 적 있다

 

 

검다리

 

이영순

 

 

푸르른 물살의 음계에 맞춰

껑충 건너다가 발밑의 돌을 본다

 

누구냐? 할 것 없이

젖지 말고 가라고

스스로 엎드린 돌

밟히고 부대끼는 나날들

얼마나 참고, 어떻게 견뎌올까

 

입이 없는 저 속

생살도 뭉그러져 떨어지고

남의 살도 내 살처럼 붙기도 했을

하얀피 주루루 흐르는

붉다 못해 검게 핀 꽃

 

흙발 눈발 비벼 발랐을

저 반들반들한 돌

서슴없이 하늘과 눈을 맞추고 있다

 

래기

 

이춘희

 

 

마른 눈물 한 줄기

처마 밑에 매달려 있다

푸른빛마저 사라진 설움 한 타래

고드름으로 달려 있다

 

조용하다

 

 

 

이형자

 

 

대둔산 계곡 달빛이 그리워

반딧불이 축제에 갔다

 

저녁 여섯시에서 일곱시

꽁지에 반짝반짝 불을 켜

짝을 부른다는 반딧불이

 

환한 달빛에 흔적도 없이

구전의 불을 켜고 날아다닌다

 

이름모를 풀벌레 울음소리만

풀숲에서 기어 나와

발걸음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시리게 쏟아지는 달빛이

반딧불이 축제의 밤을 삼켜버렸다.

 

 

 

- ['꿈과 두레박' 동인지] 『꿈과 두레박』제16집(오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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