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두레박 동인회] 제16집 작품집에서 한 편씩 소개합니다.
사진: 보문산의 늦가을
분꽃
권예자
저년, 저 염치없는 년
문주란 화분에 몰래 들어와
주인행세하는
저녁이면 색조화장으로
붉고 노란 얼굴 만들고
요염한 몸냄새로
목석 같은 남정네 꼬드겨
날밤 새우는
해 뜨면 요조숙녀인 척
가는 목 길게 빼어 입 꾹 다물고
고개 숙이는
민망한 듯 건네준
검은 사리 몇 알에도
분가루를 몰래 감추는
엉큼한 저년
분갈이
박현숙
화분이 터질 듯 꽉 찬 난
난속에 물 붓고 조심스레 엎는다
뿌리는 세상 나오기 싫은 걸까
쉽게 나오지 않는 뿌리
거꾸로 겨우 들어내니
얼기설기 엉킨 지하철이다
어떻게 비좁은 세상 살았는가
뿌리 갈라 본다
몇몇 쭉정이 버리고 알뿌리만 모아
두 개 화분 만든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티비뉴스
"정부 기관들 곧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로 이전 공무원 대다수가 서울을 떠납니다"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백경화
캄캄한 성판악의 새벽
완전무장한 등산객들 하나 둘씩 모여든다
날쌘 바람
얼굴을 알싸하게 치며 짖궂게 인사한다
뽀드득 뽀드득 하얀 눈 밟히는 소리
정감있게 들린다
손전등으로 비친 세상
온통 다이아몬드 세상이다
눈속에 빠져드는 등산화
발등까지 차오르는데
발바닥은 포근함마저 든다
하늘엔 별들이 가고 나도 가고
갈길은 멀고 마음은 벌써 다 가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침묵
이선
무채를 썰다 손을 베었다
손을 감싸 쥐고
원망스런 눈빛으로
칼끝을 노려본다
바르르
눈꺼풀에 경련이 일 뿐
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할 뿐이다
상처를 낸 것은
칼날이 아니다
시퍼런 칼도
스스로 상처 내지 못한다
가끔
무 한 쪽 베지 못한 칼
밤새도록 간 적 있다
징검다리
이영순
푸르른 물살의 음계에 맞춰
껑충 건너다가 발밑의 돌을 본다
누구냐? 할 것 없이
젖지 말고 가라고
스스로 엎드린 돌
밟히고 부대끼는 나날들
얼마나 참고, 어떻게 견뎌올까
입이 없는 저 속
생살도 뭉그러져 떨어지고
남의 살도 내 살처럼 붙기도 했을
하얀피 주루루 흐르는
붉다 못해 검게 핀 꽃
흙발 눈발 비벼 발랐을
저 반들반들한 돌
서슴없이 하늘과 눈을 맞추고 있다
시래기
이춘희
마른 눈물 한 줄기
처마 밑에 매달려 있다
푸른빛마저 사라진 설움 한 타래
고드름으로 달려 있다
조용하다
달빛
이형자
대둔산 계곡 달빛이 그리워
반딧불이 축제에 갔다
저녁 여섯시에서 일곱시
꽁지에 반짝반짝 불을 켜
짝을 부른다는 반딧불이
환한 달빛에 흔적도 없이
구전의 불을 켜고 날아다닌다
이름모를 풀벌레 울음소리만
풀숲에서 기어 나와
발걸음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시리게 쏟아지는 달빛이
반딧불이 축제의 밤을 삼켜버렸다.
- ['꿈과 두레박' 동인지] 『꿈과 두레박』제16집(오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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